영화에 자주 등장해서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커다란 망치를 든 천둥의 신 '토르'를 아시나요? 토르가 맹활약하는 북유럽 신화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이집트 신화와는 완전히 다른, 아주 독특하고 슬프면서도 몹시 가슴 뜨거운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바로 신들이 다스리는 세계가 끔찍한 괴물들과의 전쟁으로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는 최후의 날, '라그나로크(Ragnarok)' 이야기입니다. 보통 옛날이야기 속의 신들은 절대 죽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북유럽의 신들은 언젠가 자신들이 죽고 세상이 잿더미로 변할 것이라는 무서운 미래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북유럽 신들이 피할 수 없는 멸망 앞에서도 어떻게 맞서 싸웠는지, 그리고 이 슬픈 멸망의 이야기가 사실은 얼마나 가슴 뛰는 커다란 희망을 품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추위와 싸우며 살았던 바이킹, 그들이 상상한 신들의 모습
얼음과 눈으로 덮인 척박한 북쪽 땅에서 태어난 이야기
북유럽 신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옛날 북유럽 사람들을 알아야 합니다. 흔히 '바이킹'이라고 불렸던 이 사람들은 일 년 내내 얼음과 눈이 덮여 있고 뼛속까지 시린 차가운 바람이 부는 아주 춥고 거친 땅에서 살았습니다. 농사를 지을 땅도 부족하고 언제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지 모르는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아주 용감하고 거칠게 바다를 누비며 싸워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매일매일 목숨을 걸고 힘든 자연과 싸워야 했던 사람들의 삶은 자연스럽게 그들이 상상하고 믿었던 신들의 이야기에도 고스란히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영원하지 않고 완벽하지 않아서 더 매력적인 신들
그래서 북유럽의 신들은 그리스 로마의 신들처럼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하거나 우아하지 않습니다. 신들의 최고의 왕인 '오딘'은 세상의 지혜를 얻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한쪽 눈을 뽑아버려 애꾸눈이 되었고, 용감한 전쟁의 신 '티르'는 무서운 늑대 괴물을 묶어두기 위해 자신의 오른손을 기꺼이 괴물의 입속에 집어넣어 외팔이가 되었습니다. 가장 힘이 센 천둥의 신 토르 역시 똑똑하기보다는 성격이 급해서 자주 실수를 저지르곤 합니다. 북유럽 사람들은 상처도 입고 늙기도 하며 심지어 죽을 수도 있는 불완전한 신들의 모습을 통해, 춥고 척박한 현실 속에서 상처투성이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의 끈질긴 모습을 그대로 투영했던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날, 라그나로크가 다가오다
신들과 괴물들이 벌이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마지막 전투
북유럽 신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세상의 끝인 '라그나로크'가 올 것이라는 예언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라그나로크가 시작되면 세상에는 끔찍하게 추운 겨울이 3년 동안 이어지고, 사람들은 먹을 것을 빼앗기 위해 서로를 찌르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됩니다. 하늘의 해와 달은 괴물 늑대들에게 잡아먹혀 세상은 캄캄한 어둠에 휩싸입니다. 이때 신들의 세상에 갇혀 있던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쇠사슬을 끊고 뛰쳐나와 신들을 향해 맹렬하게 공격을 시작합니다. 입을 벌리면 윗입술이 하늘에 닿을 만큼 거대한 늑대 '펜리르'와, 지구를 한 바퀴 감쌀 만큼 거대한 바다뱀 '요르문간드'가 불을 뿜으며 몰려옵니다.
질 것을 알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위대한 용기
최고의 신 오딘과 천둥의 신 토르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은 이 끔찍한 전투에서 자신들이 괴물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싸우다 죽을 것이고 세상이 멸망할 것이 뻔히 정해져 있다면, 무서워서 도망치거나 미리 포기해 버리고 싶지 않을까요? 하지만 북유럽의 신들은 운명을 탓하며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빛나는 갑옷을 입고, 가장 튼튼한 무기를 꽉 쥐고서 당당하게 괴물들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오딘은 거대한 늑대 펜리르에게 잡아먹히고, 토르는 바다뱀 괴물의 머리를 망치로 박살 내지만 결국 괴물의 독에 중독되어 아홉 발자국을 걸은 뒤 쿵 하고 쓰러져 죽고 맙니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세상과 자존심을 위해 끝까지 맞서 싸우는 것, 이것이 바로 척박한 땅을 개척했던 바이킹들의 가장 빛나는 '용기'였습니다.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새싹, 끝은 곧 새로운 시작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품어준 새로운 생명
신들도 죽고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되어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 있던 거대한 나무인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껍질 속에 숨어 있던 두 명의 인간, '리프'와 '리프스라시르'가 무사히 살아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이 꺼지고 맑은 물이 다시 차오르자 두 사람은 나무 밖으로 나와 새롭게 깨끗해진 푸른 땅을 밟았습니다. 죽은 해의 딸이 새롭게 태어나 다시 세상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고, 죽은 신들의 훌륭한 자식들이 살아남아 옛날의 아름다웠던 세상을 다시 짓기 시작했습니다.
멸망이 아니라 순환을 믿었던 지혜로운 사람들
북유럽 사람들은 왜 세상이 망하고 신들이 죽는 슬픈 이야기를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자연을 관찰하며 배운 지혜 때문입니다. 북유럽의 혹독하고 긴 겨울이 오면 모든 식물이 얼어 죽고 세상이 끝난 것처럼 꽁꽁 얼어붙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무서운 겨울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따뜻한 봄이 오고 땅에서 새로운 초록색 싹이 돋아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즉, 라그나로크는 세상이 영원히 사라지는 끔찍한 끝이 아니라, 낡고 병든 옛 세상을 불태우고 새롭고 깨끗한 세상을 다시 열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추운 겨울' 같은 계절의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라그나로크가 알려주는 것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라그나로크처럼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적이고 힘든 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준비했던 시험에 떨어지거나,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과 헤어지거나, 노력했던 일이 엉망진창으로 실패해서 마음이 까맣게 타버릴 때 말입니다. 그럴 때면 다 포기하고 바닥에 주저앉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북유럽 신화는 우리에게 등 뒤를 토닥이며 위로해 줍니다. 지금 겪고 있는 그 실패와 슬픔은 절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불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생명을 품고 있던 튼튼한 나무처럼,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이 숨어 있습니다. 졌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당당하게 맞서 싸웠던 토르처럼 씩씩하게 오늘을 버텨내 보시길 바랍니다.